Trieste_대륙의 전쟁 - 4장. Throw. 크루어를 던지다
| 21.02.03 12:00 | 조회수: 1,950


가리온은 검 끝에 닿는 감촉을 느꼈다. 그것은 통쾌함이었다.

"이제 끝이다!"

위태로운 자락에서 겨우 안전한 곳으로 한발 디딘 느낌이었다. 슈마트라 초이, 아버지를 구하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자. 트리에스테 대륙에 평화는 오고 모든 것은 끝나게 된다. 이제, 아버지를 모시면서 숨어서 살자. 책임과 지위에 구속되어야 하는 것은 질렸다. 속 편한 혼자가 되는 거다. 다른 생각은 필요 없었다. 가리온은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설령 사람들이 괴롭히더라도 자신은 듀스 마블을 처형했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이제는 트리에스테 대륙에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떳떳하게 살아도 된다고 말이다.

폭발 후 남은 연기가 개이고 먼지가 가라앉을 때 가리온은 자신의 인생도 트리에스테 대륙도 이제는 카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맑게 개이리라 확신했다.

“…!”

치명타가 틀림없다. 그런데 듀스 마블은 피를 흘리고도 죽지 않았다. 헬리시타의 루앙 광장에서 보았던 비굴한 표정도, 고통의 표정도 없었다. 가리온을 쳐다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듀스 마블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다시 주문을 시작했다. 가리온은 특별히 외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충격이 컸다. 꼭 둔기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확실했는데.”

가리온은 잠깐 동안 이대로 듀스 마블을 절대로 제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겨우 다시 잡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리온의 머리 속에 가득 찼다.

“이럴 수는 없어.”

가리온은 다시 검을 들었다. 몸을 격하게 회전시켰다. 듀스 마블이 생성해낸 검은 연기의 잔상이 아직 남아 있어서 가리온 곁에서 일렁이는 공기가 눈에 보였다. 가리온의 검은 특별할 때 그렇듯이, 알로켄의 징후를 드러내었다. 하얀 빛으로 변한 검은 가리온의 공격력을 더 세게 해줄 것이었다. 그 사이 듀스 마블은 다시 한번, 냉기의 속성을 이용해 마법을 펼쳤다. 가리온은 땅 위로 올록 솟은 얼음을 검으로 갈랐다. 반으로 갈라진 얼음 사이로 듀스 마블에게로 가는 길이 펼쳐졌다.

“죽어라!”

가리온은 다시 한 번 듀스 마블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 듀스 마블을 향해 두 번을 연이어 내려쳤다.

“블리드 슬래쉬!”

듀스 마블의 어깨에서 더욱 진한 피가 흘러 내렸다. 가리온은 멈추지 않았다. 몸을 돌려 듀스 마블을 연타하기 시작했다.

“아이겐 데쉬!”

한 번, 두 번, 세 번…. 가리온은 총 여섯 번, 듀스 마블의 몸에 알로켄의 징후를 갈겼다.

“하아. 하아.”

가리온은 연거푸 움직인 덕에 호흡이 가빠졌다. 그러나 가리온은 지칠 수가 없었다. 듀스 마블은 두꺼운 덩치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공중에서 주문을 외웠다. 가리온은 분노했다.

“도대체 왜 쓰러지지 않는 거냐!”

가슴에서 타오르는 복수의 핏덩이를 이제 그만 뱉어내고 싶었다.

“어서 죽어라! 나의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를 내놓아라! 너는 나의 가족을 말살시켰고 트리에스테는 멸망에 처했다.”

“아니. 아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지. 그게 아니야.”

익숙한 목소리. 헬리시타를 떠나던 날 들었던 목소리들 중의 하나가 분명했다.

가리온은 뒤를 돌아 보고 싶지 않았다. 눈 앞의 듀스 마블을 결단 낼 순간이었다.

“듀스 마블이 가족을 말살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트리에스테 대륙에 멸망을 가져 올 것은 너희 부자라며?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거침 없는 말 솜씨는 아이언 테라클이었다. 가리온은 숨을 헐떡이며 돌아섰다. 눈에는 방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베어있었다. 그러나 아이언 테라클에게 가리온을 이해해줄 배려심 같은 것은 없었다.

“가리온 초이. 듀스 마블에게서 물러나라. 너의 일이 아니다.”

“내 아버지를 가둔 자요.”

“너에게는 자격이 없다.”

“나는 인카르의 청기사요.”

가리온 초이는 팽팽히 아이언 테라클을 노려 보았다. 듀스 마블의 목숨은 가리온이 직접 끊고 싶었다. 그것이 어머니 디에네 비노쉬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를 위해 가리온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그 강한 눈빛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얼굴을 찡그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오늘부터는 그렇지 않다. 너는 알로켄의 후손. 더 이상 네게 청기사단을 맡길 수는 없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잔바크 그레이를 가리켰다.

“이제부터는 잔바크 그레이가 청기사단을 이끌 것이다.”

잔바크 그레이는 갑작스러운 아이언 테라클의 말에 놀랐지만 싫지 않았다.

“잔바크 그레이는 내 뒤를 이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물론 혈통 또한 확실하다.”

가리온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다. 크루어를 들고 아레스 벌판, 스파이더 퀸의 등에 서있던 자신의 모습이 아스라이 지나갔다. 그때 가리온은 정말 기뻤다. 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 전혀 몰랐다. 크루어를 들고 돌아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에게 인정받을 희망으로 가득 찼었다. 하지만 이제 현실에 그런 희망은 없는 듯 했다. 그때의 크루어를 지금도 들고 있지만 영광을 받칠 아버지는 잡혀 있고 인카르 교단은 자신을 죄인 취급했다.

은빛 크루어는 빛나고 있지만 가리온은 빛나지 않았다. 가리온은 크루어를 물끄러미 보다가 아이언 테라클 쪽으로 던졌다.

“크루어는 넘기겠다.”

이 말 한마디에 갑자기 모든 것이 고요해진 듯 했다. 잔바크 그레이는 입을 앙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는 크루어와 가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파그노와 칸은 잔바크 그레이와 크루어를 번갈아 보았다. 구석에서 캄비라 바투와 룸바르트를 치료하고 있던 가리온의 일행들은 가리온을 향해 달려왔다.

“가리온. 이러면 안 되요!”

슬픈 눈망울을 가득 담고서 달려온 것은 시에나였다. 시에나는 크루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가리온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가리온이 크루어의 주인이 되던 순간, 시에나가 그리폰을 타고 날아왔다.

“….”

에바는 시에나와 달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가리온이 크루어를 내던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루어를 내던지고, 인카르 교단을 등지고, 세상을 등지고 둘 만이 남는 것. 그리고 어머니 디에네 비노쉬에 대한 비밀을 평생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에바가 바라는 바였다.

“크루어를 넘길 테니, 대신에 듀스 마블은 내게 넘겨라.”

가리온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렇게 말했지만 아이언 테라클이 가리온이 바라는 대로 응해 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가리온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가리온은 분했지만 억눌렀다. 이 분노는 온전히 듀스 마블에게로 향해야 했다.

“미련하구나. 기사가 검을 버리면 무엇으로 싸우겠다는 게냐. 크루어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저 크루어는 알로켄의 피를 가진 중간자가 쓰던 것이니, 저주받은 검이다. 새로운 주인에게 저주를 내릴 속셈이구나.”

아이언 테라클은 가리온의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듀스 마블은 자신의 먹이였다.

“율법을 알지 않느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너는 더러운 피로 대륙을 오염시키고 우리를 속였다. 게다가 너의 조상은 인류의 적이다. 그랜드 폴을 일으킨 칼리지오 밧슈가 너의 조상이지 않느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가리온은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의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도 그 더러운 칼리지오 밧슈의 피를 가졌을 터, 모든 죄인은 인카르 교단이 처벌한다. 듀스 마블과 너 가리온 초이를 헬리시타로 호송하겠다. 더불어 너의 아버지, 검성 슈마트라 초이도! 모두 사죄의식에 처하리라!”

한 순간 가리온의 눈에 사람들은 모두 제대로 서 있는 것 같은데 땅이 흔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리온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없었다. 더러운 피 운운하는 것을 들으며 살기보다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구하고 싶었다. 구해야만 했다. 그것이 가리온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언 테라클은 아버지마저 끌고 가 사죄의식의 단상에 올리겠다고 한다.

“그럴 수는 없어.”

그것은 절대로 안될 일이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이미 한 번의 사죄의식으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가리온은 그것을 한 번 더 볼 수 없었다.

“가리온 초이를 묶어라! 헬리시타로 데려가자!”

아이언 테라클은 자신의 군대에게 명령했다. 잔바크 그레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갔다. 언제 집었는지 그의 손에는 가리온이 던진 크루어가 있었다.

“가자! 나 잔바크 그레이를 따르라!”

몇몇 병사들이 나올까 말까 주춤하다가 잔바크 그레이가 앞서는 것을 보고 따라 달렸다. 가리온은 맨 앞에서 달려 오는 잔바크 그레이를 보며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를 한번 더 사죄의식에 올리게 하는 일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가리온이 자세를 잡자 달려오던 병사들은 다시 돌아갈까 망설였다. 잔바크 그레이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저 자는 검을 버렸다! 기사가 검 없이 어떻게 싸우겠는가! 크루어는 내가 들었다!”

잔바크 그레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병사들은 다시 가리온을 잡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가리온의 앞에서 검은 폭발이 터진 것이었다. 달려오던 병사들은 흙덩이와 함께 땅 위로 솟구쳤다. 얼굴 반쪽, 다리 짝이 붉게 터졌다. 가리온과 아이언 테라클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다시 원기를 회복한 듀스 마블이 자신의 모든 적을 파괴하기 위해 주문을 외웠고, 그것이 용케도 가리온을 도운 것이었다.

“저, 저! 듀스 마블!”

흥분한 아이언 테라클은 모든 병사에게 지시했다.

“당장 가서 듀스 마블도 잡아라! 가리온 초이와 듀스 마블은 한패다!”

“안돼!”

붉은 채찍이 아이언 테라클 앞을 둥글게 갈랐다.

“뭐냐! 세그날레!”

“큰 것을 바라진 않아요. 그냥 저 두 사람의 피가 섞이는 것을 보게 해줘요.”

타마라는 싱긋 웃었다.

“무슨 소리지? 웃기지 마라! 나는 세그날레를 믿지 않아! 내가 비나엘르 파라이처럼 보이느냐? 자, 어서 가서 듀스 마블과 가리온 초이를 잡아라!”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잖아요. 한바탕 피의 잔치를 벌려보자구요.”

타마라는 달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채찍을 날렸다.

“뭐해요. 가리온을 안 도울 거예요?”

이 말에 시에나와 에바도 앞으로 나섰다.

“웃기지도 않은 것들이!”

“가리온! 어서 가요!”

타마라가 외쳤다. 그 순간 듀스 마블이 또 공격을 펼쳤다. 불덩이들과 화염이 계속 터져 나왔다. 검은 연기는 가리온이 아이언 테라클의 군대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가리온은 듀스 마블을 향해 달렸다. 크루어를 내던진 손에는 흰 빛이 뚜렷한 검이 한 개, 그리고 또 한 개. 양손에서 길게 뻗어 나왔다. 크루어를 버리고 가리온은 차라리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듀스 마블을 응징할 수 있다는 확신마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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